12월에 배달을 시작했다. 용돈 벌 목적도 있었으나, 배달원이 없어서 음식 주문을 받지 못하는 요즘 시국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마음 역시 있었다. 그래서 할 때에는 정말 열심히 했다. 시간도 맞추려고 했고 음식도 식지 않게 배달하려고 나름 머리도 썼다.
다행히 한 달 넘게 배달하면서 사고는 단 한 번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로 배민 배달 50건을 넘겼고, 드디어 배달 사고가 터졌다. 지금까지 배달사고가 날 뻔한 적이 몇 번 있어서 걱정했는데, 지금까지 사고가 없었음이 증명되는 날이기도 했다.
오늘 상황은 대략 이랬다.
1. 고객이 주문할 때 요청하지 않은 사항을 가게에 전화해서 추가로 요청함.
- '문이 두 개인데, 큰 문을 열고 들어간 후 문 앞에다가 두고 가라.'
2. 배달하면서 해당 내용을 숙지하면서 배달함. 사진도 찍어놓음.
- 딱 들어선 순간, 고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직감했다. 우리집도 문이 두 개가 있는 구조라서...
3. 이후 두 건의 배달을 더 한 후 고객이 음식물을 받지 못했다고 메시지로 전달 받음.
4. 재주문 처리가 됐다고 확인 받았고, 다음 배달을 진행. 재주문 건도 나에게 접수됨.
5. 이후 갑자기 배민 직원이 전화해서는 내 잘못 아니냐고 추궁함. 찍어놓은 사진으로는 확인이 안된다고.
6. 가게에 가서 확인하고 결제하라고 해서 내 돈으로 처리됨.
7. 재배달하면서 내 잘못이 아닌 것으로 확인됨. - 같은 곳, 같은 장소.
알고보니,
1. 고객은 집을 비우는 바람에 위의 추가 요청 사항을 원함.
2. 고객의 집은 옆집과 같은 복도를 바라보고 있었음.
3. 옆집 사람이 배달된 음식물을 가져감.
4. 고객은 배달되지 않았다고 컴플레인함.
결국 내 잘못이 아닌 게 밝혀지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감정소비가 너무 심했다.
나는 50건 넘게 배달하면서 사고도 한 번도 안 냈는데,
1. 전화해서 다짜고짜 내 잘못이라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부터 기분이 나빴다.
2. 그리고는 가게에서 내 생돈으로 결제하는 것도 기분 나빴다.
- 배달할 때마다 보험료는 꼬박꼬박 떼 가면서 정작 배달 사고에 대한 보험은 없고 모두 내 책임으로 전가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3. 고객과의 대화를 통해 내 잘못이 아니란 걸 증명했는데, 정작 배민측에서는 고객에게 확인도 하지 않았다.
- 고객이 나를 만났을 때는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이후 나한테 전화해서 혹시 불이익 받는 게 있냐고 재확인까지 해줬다. 그리고 옆집에서 가져간 음식도 찾았는데, 자신이 먹어도 되냐고까지 물어봤다. 😱
4. 어쨌건 내 잘못이 아니라서 배민에서 지불하기로 결정됐고, 다시 가게에 방문했으나 가게는 전달 받은 게 없다고 해줄 수 없다고 했다.
5. 가게에서 30분 넘게 기다렸으나 환불 받지 못했다.
6. 집에 돌아와서 수차례 문의를 넣으니, 30분 정도 지나서야 확인됐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환불 받기 위해 한 시간 반을 더 소비한 셈이다.
오늘 배달사고 덕분에 배달을 한 건 더 했으니 금전적으로는 이득이었을지는 몰라도, 맥락 없이 내 책임으로 전가되고 내 카드로 결제하고 다시 환불 받았던 두 시간 반은 정말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위의 모든 일들이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 밖에서 벌벌 떨면서 벌어진 일들이다. 나는 배달 음식을 갖고 있어서 이 음식이 식기 전에 배달도 해야 하는데, 전화로 추궁당하고 있으니 감정 소모는 더 심해졌다.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이유는 배달원에게 떠넘기는 프로세스에 대해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배달 책임이 전가됐을 때에는 '내가 무슨 이유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배달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배달해봐야 실수나 사고나 발생하면 배달원이 100% 다 책임지는 이 구조를 보면 의욕이 상실된다. 10,800원짜리 배달음식이어서 다행이었지, 5만 원정도 나가는 음식이었으면 오늘 내내 배달해서 번 돈보다 더 큰 돈이 나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한다. 내가 춥고 지쳐서 별 생각 없이 알았다고 했으면 내 생돈 만 원이 나갔겠지? 심지어 재배달이 나한테 다시 걸리지 않았어도 나는 증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배달하시는 분들 중에서 이런식으로 떼이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배달에 대해서 배달료는 받지 않거나, 가게에서 청구했으니 회사와 반반 부담하자고 정중하게 말했으면 오히려 기분이 덜 나빴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괜찮지만 다음부터는 조금 더 신경써 달라고 했으면, 내 입으로 미안하다고 말도 했겠지... 추운 날의 감정소모에 나 역시 응대 직원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직원 잘못도 아닌데, 한편으로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배달의민족은 배달사고에 대해 보다 유연하지만 확실한 프로세스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오늘 일로 배달일에 대한 흥미가 확 꺾였다. 영하 10도에 고생해봐야 운 없으면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 없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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